[진보여성웹진]
올 여름, 여성주의 책으로 에너지 충전!
2011.7.20
박선민
(곽정숙 의원실 보좌관)
나는 술을 즐기지 않는다. (술자리는 즐긴다.)
사람들은 종종 음주가무와 거리가 먼 나에게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냐고 물어본다.
어제도 우연히 만난 다른 보좌관의 부인이 물어보는데 “일하면서 풀어요.”라고 대답했다.
아마, 좀 재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나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 그동안 쌓였던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풀린다.
그런데 어느 날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 못 읽거나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못 보면 그게 더 큰 스트레스가 된다는 걸 문득 깨닫고, 다른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수다 떨기(뒷담화가 포함된)나 맛있는 음식 먹기, 좋은 경치 구경하기, 여기저기 걸어 다니기가 상당한 효과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좋은 사람들과 같이 위와 같은 것들을 즐기면 근심걱정 사라지고, 온 몸에 엔돌핀이 솟아나온다. 에너지 충전이 완료되면 다시 열심히 일할 의욕이 샘솟는다.
어쨌든 아직도 책과 영화는 나에게 가장 강력한 배터리다.
올 여름, 여성주의 책과 함께 에너지를 충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추천 순서는 없다.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복잡한 이론서는 포함하지 않았다. 오래된 책도 많다. 베스트셀러도 여러 권 포함되어 있으니 이미 다들 읽은 책 일지도 모르겠다. 아래 적힌 10권을 다 읽었다면 그대는 나의 소울메이트!)
1. 불량소녀백서 (김현진, 2005)
저자는 책을 쓴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한없이 사랑스런 그녀들이 내가 했던 삽질과 내가 박살냈던 삶의 과정으로 걸어 들어갈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팠다. 아, 내가 십대 때, 스무 살 때, 그놈하고 자지 말라고, 그런 말 듣고 참지 말라고, 연애에 목숨 걸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는 언니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내 삶에 윤기가 있었을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을 진리인 줄 알았던 내 소녀시대를 생각하며 나는 종이 위에 쓴다. 불량소녀백서, 라고."
그리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나'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나'가 되고 싶다면 당신이 바로 불량소녀라고!
‘우리 매대에 놓인 상품이 아니’라고 말하고, ‘불평을 하자, 신나게’, ‘이런 남자하고는 절대로 자지 마라’는 충고를 접수하고 ‘불량소녀로 당당히 살자’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정말 미치게 사랑스럽다. 우리 불량소녀들.
2.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2009)
이 책의 주인공은 ‘못생긴 여자’다.
‘성공 신화’ 중심의 우리 사회에서 ‘잘 생겼다’는 것은 하나의 스펙이기에 못 생겼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실패라고 본다. 성형수술이 각광 받고, 외모 가꾸기 관련 산업이 성행한다.
가난하고, 못생긴 여성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지만 이 책은 못 생긴 여자에게도 ‘삶’이 있다고 말한다. (당연하다고? 세상을 모르는군.)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고, 다시 사랑을 하고, 아이의 똥을 닦아주며 살아간다. 늙어간다.
우리 모두는 상처를 안고, 또 다시 사랑하며 살아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세상 무엇보다 위대하다.
못생긴 여자와 그녀를 사랑한 그를 통해 세상의 통념을 비틀고, 삶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카스테라」의 작가 박민규가 쓴 책이다. 나는 그를 이 시대의 천재작가라고 부른다.
3. 나는 내 그림 속에 있었다. (로다 자미, 1997)
그녀의 그림은 보기가 불편할 정도로 현실적이며 상징적이다.
(자화상 속의 그녀는 언제나 콧수염이 있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우상 남미의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
그녀는 1930~40년대 멕시코 벽화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벽화예술가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으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치열한 혁명가로, 뛰어난 화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프리다’는 '자유'라는 뜻인 "Friede"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아마비, 교통사고 등으로 평생 30번의 수술을 받는 등 자신의 힘으로 몸을 움직이기 조차 쉽지 않았던 고통 속 인생이었지만, 그림 속에서만큼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다.
남미의 혁명적 벽동기에 당대 좌파 그룹들과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며 역시 사상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열정적으로 살았다.
죽을 때까지 스탈린주의자였으며 멕시코의 정체성을 고수했던 그녀의 그림과 만나보자.
(피카소, 트로츠키가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인물이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모두가 살아있던 사람이구나.........)
4. 플라스틱섹스 (이남희, 1998)
이 책은 젊은 동성애자들의 이야기다. 젊은 애들 이야기라 속도감 있고 재밌다.
초록이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언닌 그렇게 느껴? 난 이게 편하고 좋은데."
"하지만.... 뭐랄까.... 여지껏 내 취향은 남자였어."
"그렇겠지. 음. 그럴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좋으면 그걸로 된 거잖아? 무슨 말이 필요해?"
"하지만 편치는 않아. 뭔가가 자꾸 걸려."
자신이 느끼는 거리낌을 설명하기가 어려워 은명은 초조해졌다.
초록이가 다시 하품을 하곤 피식 웃었다.
"말하는 거하곤 다르네!"
나도 그랬다. 말로는 “그게 뭐 어때서?”라고 하면서, 말하는 거하고는 다르게 뭔가가 자꾸 걸리는 느낌.
이 책을 읽으며 나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그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도덕적 차원의, 마지못한 인정이 아니었는지 반성했다.
소설 자체는 덜 익은 사과 맛이다.
동성애에 대한, 여성에 대한 작가의 표현은 ‘서걱거리는 느낌’을 가중시킨다.
쉽고 가볍게 읽기는 좋지만 조금만 더 깊이가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5. 붉은 포대기 (공선옥, 2003)
"붉은색"은 삶에 대한 강렬한 희망과 여성성의 상징이라고 한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이 책은 여성의 삶에 밀착되어있는 소설이다.
삶은, 어디로부터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가.
작가의 시선은 ‘모성’, 그 징글징글한 아름다움에 집착한다.
이 책에서 ‘가정’은 일정한 정형을 갖지 않으며 가정의 본질은 오로지 모성에서 시작하여 모성으로 완결된다.
남자에게 버림(!)받고, 유부남이 된 그 남자에게 또다시 상처 받는 주인공은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여성’으로서 삶을 나누고, 여동생의 삶과 사랑에 대한 존중을 통해 비로소 자신에게서 벗어나 가족과 세상에 대해 '공동체'적 감정을 느끼게 된다.
붉은 포대기는 용서와 화해, 치유, 계승의 상징이다.
푸른 포대기도, 노란 포대기도 아닌 붉은 포대기는 얼마나 강렬한 상징인가.
위대한 모성. 그것이 한 가정과 한 여성의 내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향하여 전진할 때에 더욱 가치가 있을 것이다.
다만, ‘붉은 포대기’는 남성중심의 사회에 대한 도전이며 강렬한 상징이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을 깨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점은 한계다.
따뜻한 작가의 감성 때문인지도.
6. 불꽃의 자유혼, 허난설헌 (김신명숙, 1998)
신선세계를 바라보며
허난설헌
구슬꽃은 하늘거리고 파랑새는 나는데
서왕모는 기린 수레타고 봉래섬으로 가네.
흰 봉황 수레에 오색 깃발 휘날리고
붉은 난간 기대어 예쁜 풀을 뜯네.
푸른 무지개 치마는 바람에 날리고
구슬고리와 노리개는 소리내며 부딪치는데
흰옷 입은 선녀들 쌍쌍이 거문고를 뜯고
구슬나무 위에는 봄구름이 향그러워라.
동틀 무렵에야 부용각 잔치는 끝나고
푸른 바다의 청동은 흰학을 탄다네.
보랏빛 퉁소 소리에 무지개가 날리면
이슬젖은 은하수에는 새벽별이 떨어지네.
"감정아, 내 사랑하는 딸아" 로 시작하는 13장 '잉모도의 꿈' 첫 머리에 나오는 허난설헌의 시다. 잉모도는 ‘신선이 노니는 곳이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조선의 여인들이 조선의 여인됨이 후회스럽지 않은 곳’이다.
허난설헌이 처한 조선의 현실도 녹록치 않아 ‘긴 시간 지나지 않아 꿈같은 섬 잉모도는 토벌 당하고, 산속 깊은 곳에 만든 또 다른 여인마을도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허난설헌은 ‘허나 끝이란 그리 쉽게 오지 않는 법’이라고 한다.
소름이 돋았다. 모두 토벌 당하고, 사라졌지만, 그대 아는가? 끝이란 그리 쉽게 오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오늘 여기 우리가 있지 않은가. 잉모도의 꿈을 간직한.
"그런 암흑의 시기에도 한 줄기 빛은 있었다. 어느 시기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여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밝은 의식을 가지고 분노할 줄 아는 그녀들은 바람과 구름과 안개가 전해주는 여자들의 땅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들은 난설헌과 두란향과 감정과 옥지와 설란의 딸들이었다. 그녀들 사이에서는 난설헌이 남긴 책에 관한 얘기가 은밀히 전해졌다. 이 세상 어딘가에 여자들의 아름다운 꿈을 노래하고 그 꿈을 이룰수 있는 길을 밝혀준 소중한 책 하나가 숨겨져 있어. 그 책이 세상에 나오는 날, 우리 여자들은 여자들의 땅을 만들 수 있을 거야."
오늘도 그 책은 여성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눈길로 읽히고 있다.
이 땅에 신선세계를 건설하고, 선녀처럼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난설헌이 남긴’ 책을 읽는다.
7. 오빠는 필요 없다 (전희경, 2008)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누가 금지 시키지도 않았지만, 금기가 되어버린, 운동권 사회의 가부장에 대한 이야기.
구구절절 어찌나 바른 말들이 쓰여 있는지, 읽으면서 완벽하게 공감하는 나에게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이 책을 읽고 후배와 이야기를 나눴다.
"다 맞는 이야긴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니? 우리가 당사자라 그런가봐."
바꾸고 싶지만, 바꾸지 못했던 당사자. 날마다 겪으면서 '이건 문제에요.'라고 말하지 못했던 당사자.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해 버렸던 당사자.
지금 다시 시작하라고 한다. 포기하지 말고.
말하자, 오빠 따위 필요 없다고.
그런데, 편집이 너무 후지다. 확확 쳐내면 책이 반은 얇아지겠다. 동어반복이 많다.
여성주의가 꼭 '어려운 단어'를 동반 하는 건 아닌데 말을 어찌나 꼬아서 하는지. 읽다가 인내심 폭발할 수도.
8. 이어달리기 (난나, 2006)
일하는 여성들에 관한 열 가지 이야기다.
여성의 삶, 여성의 노동에 대해 만화와 짧은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쉽게' 전한다.
이어달리기.... 제목이 정말 좋다.
혼자 뛰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아득함은 말할 수 없는 절망이 되는데, 내가 이만큼 뛰고 나면, 그 다음 주자가 또 있겠지 생각하니, 뛸만한 것도 같다.
지난 번 ‘나는 내년에도 일할 수 있을까’를 읽고 많은 사람이 의견을 줬다.
일하는 여성, 특히 아이가 있는 여성들은 격하게 공감했다.
아이가 있는 남성들은 ‘우리도 힘들어요.’라고 했다.
아이가 없는 여성들은 ‘나도 이렇게 될까봐 걱정돼요.’라고 했다.
아이가 없는 남성들은 ‘힘들게 사시네요,’라고 하긴 했지만 전혀 와닿지 않아 했다.
이렇게 분류하는 게 사실 참 우스운 일인데, 어쩌면 이렇게 공통된 반응이 나오는지 그건 더 우스웠다. 이 책은 일하는 여성들만 읽기 바란다. 읽어도 공감하지 어려울테니.
9. 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2007)
나는, 공지영이 부러웠다.
베스트셀러 작가여서가 아니라 베스트셀러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세번 결혼하고, 성이 다른 세아이를 키울 만큼 자기 삶에 당당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물론 작가는 당연히 '소설'이라 했지만- 당당함의 이면에 다른 사람과 꼭 같은 고민, 같은 갈등, 같은 고통이 있었구나 싶어, 미안하게도, 마음이 놓여버렸다.
내 마음과도 꼭 같아서, 자꾸 눈물이 솟았다.
"엄마 글 잘 쓰게 기도해줘.......... 막내까지 대학 보낼 수 있을지............. 무서워."
"생각해 보면, 혁명의 환상이 깨어지던 순간부터, 혁명보다 지독한 일상이 우리에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네 아빠와 나는 점점 말이 없어져갔다."
"탈출구가 없었고, 엄마는 멍하니 텔레비전만 보며 엄마의 이십대 후반을 보낸다. 너는 크고 있었고, 우리는 여전히 가난했어."
"하지만 엄마는 그때 한 글자도 더는 쓸 수가 없었어. 그렇다고 집을 떠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고 개선의 희망조차 없는 삶......... 그때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안이한 선택을 하게 되었단다. 그건 그냥 나를 희생하고 말기로 한거지."
나는 지금, 가장 안이한 선택을 했다. 맙소사. 슬프다.
(주인공은 즐거운 '우리' 집을 버리고, 즐거운 '나'의 집을 만든다. 남들이 뭐라든, 참 괜찮은 방법이다.)
10. 작은 여자 큰 여자 사이에 낀 두 남자 (장차현실, 2008)
“장애와 비장애, 성별과 나이의 벽이 없는 또리네 집 이야기”
기분 좋고 싶어서 읽은 책이다.
기대대로, 읽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주 유쾌해 졌다. 하트 뿅뿅.
작가는 알까? 장애아를 키우는 싱글맘의 삶에 부러운 마음 날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작가가 일곱살이나 어린 젊은 남자와 동거하게 된 것은 그 부러움의 정점이었다.
물론, 동거하지 않았다 해도 작가의 삶은 상당히 부러웠다.
세상 앞에 당당하고,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싸우는 그녀의 모습이 세상과 싸우기에 지쳐가는, 이제 좀 적당히 타협하고 싶어진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잡게 한다.
힘내라, 멋진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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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푸른숲, 200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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